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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건축사 49. 평양 보통문과 대동문 - 북한에 남은 조선 성문 건축
    한국 건축사 2025. 10. 14. 07:01

    한반도에 남은 조선시대 성문 건축은 도시의 위상을 상징하고, 군사적 방어 체계와 정치적 질서를 드러내는 중요한 건축유산이다. 그중 북한에 있는 평양 보통문과 대동문 역시 조선의 성곽 건축이 지닌 예술성과 기술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문 중의 하나이다. 두 문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전쟁과 시대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그 자리를 지켜왔으며, 오늘날 북한에서 가장 귀중한 조선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글에서는 보통문과 대동문의 역사적 배경, 구조적 특징, 복원 과정, 그리고 현대적 의미를 중심으로 북한에 남은 조선 성문 건축의 가치를 살펴본다.


    평양 보통문 건축의 역사적 배경과 조선의 도시 구조

    보통문(普通門)은 평양성의 북문으로, 평양의 중구역 보통강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 세워진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구조물은 조선 중종 8년(1513년)에 중건된 것이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 위에 자리 잡은 도시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도시 방어와 상징적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 가운데 보통문은 평양으로 들어오는 북쪽 관문으로서, 외적의 침입을 막고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성문 건축은 단순히 성벽의 출입로를 의미하지 않는다. 조선의 성문은 유교적 질서와 도시 위계 구조를 반영하는 상징적 장치였다. 평양성의 중심부에는 관청과 왕명을 대행하던 관리들이 있었고, 북문인 보통문은 그 위계를 넘어 외부 세계와의 경계를 이루었다. 보통문은 ‘보통’이라는 이름처럼 “모든 길이 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통행이 아니라, 조선이 지향한 포용적 행정 철학과 민본 사상을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보통문은 도시의 풍수적 중심축을 형성한다. 평양은 대동강을 기준으로 남쪽은 양지, 북쪽은 음지로 구분되며, 보통문은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위치에 자리한다. 이러한 풍수적 배치는 성문이 단순한 방어시설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전통 건축사상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평양 보통문
    보통문(普通門)

    보통문의 건축 구조와 예술적 미학

    보통문은 석재로 쌓은 홍예문(虹霓門) 위에 목조로 지어진 2층 누각형 문루를 올린 구조로 되어 있다. 아치형 돌문은 반원형으로 짜여 있으며, 기단부에는 정교하게 다듬은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돌문 상부에는 장대한 목조 누각이 자리하며, 이 누각은 기와지붕의 유려한 곡선과 처마의 비례미로 조선 건축의 세련된 미학을 드러낸다.

    문루 내부는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이 결합된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성문을 통제하는 장교가 상시 대기하며 통행을 관리했고, 평시에는 관리들이 머물며 북쪽 지역의 동향을 감시했다. 문루의 천정에는 단청이 정교하게 칠해져 있으며, 청록색과 주홍색이 교차하는 무늬는 조선 후기 단청의 대표적 색채미를 보여준다.

    보통문이 특별한 이유는 그 보존 상태와 복원 기술에도 있다. 1950년대 한국전쟁 때 일부가 파괴되었지만, 북한은 1960년대에 전통 목조건축 방식으로 복원하였다. 목재는 방부 처리 후 교체되었으며, 처마의 추녀는 전통 방식 그대로 재현되었다. 현재 보통문은 국보급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북한의 전통건축 전시 교육에 활용되고 있다.

     

    평양 대동문의 건축적 위상과 상징성

    대동문(大同門)은 평양성의 동문으로, 대동강을 마주한 방향에 세워져 있다. ‘대동’이라는 명칭은 “모두가 함께 어우러진다”는 뜻으로, 도시의 개방성과 번영을 상징한다. 이 문은 고구려 시대의 동문 자리 위에 조선시대에 새로 세워진 것으로, 현존 건물은 조선 중기(15~16세기경)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동문은 구조적으로 보통문과 유사하지만, 보다 웅장하고 장식적이다. 하부의 돌문은 완만한 곡선형 홍예를 이루며, 석재의 결을 살린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가 돋보인다. 상부의 목조 문루는 2층 팔작지붕 형태로, 넓은 처마 아래 장식된 공포(栱包)는 조선 후기 평양 지역의 목조건축 기술 수준을 잘 보여준다.

    건축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대동문루의 비례미다. 전체 구조의 수평선과 기둥 간격이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으며, 이는 조선 건축의 정형미를 표현한다. 또한 대동문은 군사적 방어 기능뿐 아니라 의례적 중심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정의 명령이 내려지거나 왕명 포고가 있을 때 이곳에서 의식이 열렸으며, 평양 시민들에게 국가 권위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대동문은 1950년대 전쟁 중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나, 북한은 이를 전통건축 복원의 대표 모델로 삼아 원형에 가깝게 재건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장인들이 참여해 전통 기와 제작과 단청 복원 기술을 복구하였으며, 이는 훗날 북한의 평양 고건축 복원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평양 대동문
    대동문(大同門)

    북한의 보존 정책과 조선 성문 건축의 현대적 가치

    분단 이후 북한은 평양을 정치·역사적 중심지로 규정하고,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일부를 체계적으로 보존해왔다. 특히 보통문과 대동문은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복원 및 관리가 지속되고 있다. 북한은 1960년대 후반 두 성문을 중심으로 ‘평양 고건축 보존구역’을 설정하였고, 이후 성벽 일부와 주변 도로까지 전통 양식으로 정비하였다.

    이들 성문은 오늘날 국가문화유산보호법에 의해 관리되고 있으며, 북한의 교과서에도 조선 건축의 우수 사례로 소개된다. 관광객에게 개방된 현재의 보통문과 대동문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된다. 또한 북한은 전통 목조건축의 복원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선고건축연구소를 설립, 성문 복원 자료와 도면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있다.

    현대 건축의 관점에서 보통문과 대동문은 ‘문(門)’이라는 개념의 확장된 의미를 제시한다. 문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공간을 나누면서 동시에 이어주는 상징적 구조물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현대 도시에서도 적용 가능하다. 예컨대 도시재생 프로젝트나 공공건축 설계에서 성문의 상징적 공간 개념을 차용해 개방성과 연결성을 강조하는 디자인이 등장하고 있다.

    보통문과 대동문은 결국 조선 건축의 기술적 완성도와 미학, 그리고 철학적 세계관이 담긴 건축물이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건축의 본질, 즉 인간과 자연, 권위와 공동체의 조화를 보여주는 상징이자, 한반도 건축문화의 연속성을 증명하는 살아 있는 유산이다.


    오늘날 평양의 보통문과 대동문은 단순한 옛 건축물이 아니라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역사적 자산이다. 이 두 문은 조선의 기술력, 예술적 감각, 그리고 민족의 정체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건축물로서, 미래 남북 협력의 문화적 교두보로 기능할 가능성도 크다. 성문 건축의 미학은 과거의 유산이자, 앞으로 한반도 건축이 지향해야 할 조화와 균형의 철학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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