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건축사

한국 건축사 35. 서양 건축과의 조우 - 건축가 김수근·김중업의 시도

happylife-jay 2025. 9. 29. 08:31

한국 건축사가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맞이한 가장 큰 변화는 서양 건축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전통 한옥 중심의 건축에서 벗어나 산업화와 근대화를 동시에 경험하던 시기, 한국 사회는 새로운 공간 미학과 기술을 요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수근김중업이라는 두 건축가는 서양 건축과 깊은 조우를 통해 한국 건축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두 사람은 단순히 외래 양식을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국적 정체성을 반영하는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들의 작품과 철학은 한국 건축이 단순한 수입품이 아니라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독자적 길을 찾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국제 모더니즘 운동 속에서 한국 건축을 어떻게 변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적 사례를 남겼고, 이는 이후 세대 건축가들에게 중요한 방향성을 제공했습니다. 오늘은 김수근과 김중업이 서양 건축을 어떻게 수용하고 변주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시도가 한국 건축사에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더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김수근 건축 철학과 서양 모더니즘의 융합

김수근은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그의 건축 철학은 서양 모더니즘한국적 미학의 융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는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등 서양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건축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건물의 배치와 공간의 흐름 속에 전통 한옥의 마당 개념을 반영하여 한국인의 생활 감각에 맞는 건축을 구현했습니다. 대표작인 공간사옥은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도 인간적 온기를 담아내는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직선적 구조와 간결한 외관 속에서 내부 공간은 열리고 이어지며, 이는 전통 건축에서 중요한 개념인 개방성과 유연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결과였습니다. 또한 그는 재료를 다룰 때 그 물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한국적 소박함과 진솔함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서양 모더니즘의 기능주의적 합리성을 한국적 공간 감각과 조화시킨 탁월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도시 공간에서도 예술과 건축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을 진행했으며, ‘공간 그룹’을 통해 문화 예술의 융합적 장을 열어 한국 건축을 사회문화적 차원으로 확장했습니다.

건축가 김수근의 공간사옥
김수근 作 공간사옥

김중업의 건축 실험과 르 코르뷔지에와의 만남

김중업은 한국 최초로 서양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아틀리에에서 직접 경험을 쌓은 인물로, 그의 건축 인생은 곧 서양 건축과의 생생한 조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학 시절 모더니즘의 핵심을 몸소 익혔고, 귀국 후 이를 한국적 맥락에 적용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대표작인 삼일빌딩은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고층 모더니즘 건축물이었으며, 단순히 외형적인 서양식 도입이 아니라 구조적 실험과 공간 활용 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유엔빌리지 주택에서는 자연 지형을 따라 건물을 배치하고, 내부 공간에 빛과 바람이 흐르도록 설계하여 전통 건축의 자연 친화성을 현대적으로 되살렸습니다. 김중업의 건축은 기하학적 형태와 대담한 구조를 특징으로 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한국인의 생활 방식과 정서가 녹아 있습니다. 그는 건축을 단순한 주거와 기능의 틀로 보지 않고, 한국적 사회문화적 맥락에 맞추어 재해석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서양 건축의 모방이 아닌, 한국 건축사에 맞는 변용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 근대 건축가들의 영향과도 비교될 수 있는데, 동아시아적 건축 정체성을 세계적 모더니즘과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 실험한 사례로 학술적 가치가 큽니다.

김중업의 건축
김중업 作 삼일빌딩

김수근·김중업의 차이와 한국 건축 정체성 모색

김수근과 김중업은 모두 서양 건축과의 조우를 통해 한국 현대 건축을 발전시켰지만, 두 사람의 접근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김수근은 공간의 흐름인간 중심의 친밀성을 강조하며, 도시 속에서 사람들이 편안히 머물고 교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반면 김중업은 조형적 대담함구조적 실험을 통해 한국 건축이 세계적 무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서양 건축을 단순히 수입하거나 모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그들은 한국적 건축의 본질을 자연과의 조화, 마당과 같은 열린 공간, 재료의 진솔한 사용에서 찾고 이를 현대적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특히 이들의 건축적 시도는 일본과 중국의 현대 건축가들이 서양과의 접촉에서 보인 태도와도 대비되는데, 일본이 전통을 양식화하거나 상징화하는 데 집중했다면, 한국의 두 건축가는 더 생활적이고 체험적인 요소를 반영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건축가의 시도가 오늘날까지도 건축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며, 한국 건축 정체성 모색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현대 한국 건축에 남긴 김수근·김중업의 유산

김수근과 김중업의 노력은 오늘날 한국 건축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데 있어 든든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열어놓은 길 위에서 후배 건축가들은 전통과 현대, 한국성과 국제성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최근의 한국 건축 흐름은 한옥의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전통적 공간 개념을 첨단 기술과 접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두 건축가가 남긴 사유와 실험 정신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건축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지속 가능한 건축, 친환경 설계, 지역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담론 속에서 끊임없이 참조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글로벌 건축계에서 주목받는 한국 건축가들의 작업 속에서도 김수근과 김중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승효상이나 조민석과 같은 후배 건축가들은 전통 공간 개념을 현대적 건축 언어로 풀어내며, 세계 무대에서 한국 건축의 독창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서양 건축과의 조우가 일회성이 아닌, 계속 이어지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건축사는 결국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김수근과 김중업은 그 대화의 첫 장을 열었으며, 그들의 시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영감의 원천입니다. 그들의 건축은 단순한 형태나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건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유산을 되새기는 것은 단지 과거를 회고하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한국 건축이 세계와 어떻게 대화할지 고민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건축사의 큰 흐름 속에서 보더라도, 이들의 시도는 한국 건축이 독자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